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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향토사학자 한동억〉성남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  
아리랑저널(http://ajl.co.kr)   
관리자 | 2019.02.11 07:06 |

 

컬럼 향토사학자 한동억성남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

 

<韓民族傳統硏究會 會長 雲軒 韓東億>

 

성남 지역의 대한독립만세운동(大韓獨立萬歲運動)은 고래로부터 민족적(民族的)자부심(自負心)과 애국심(愛國心)이 타지역의 추종(追從)을 불허하는 옛 광주군(廣州郡)돌마면(突馬面), 낙생면(樂生面)과 대왕면(大旺面), 중부면(中部面)의 일부지역(一部地域)이었다. 준왕(準王)이 위만에게 쫓기어 남하하여 광주시 경안(京安)에 진국(辰國)이라는 나라를 세울 때에도 준왕을 따르는 무리들의 충성심(忠誠心)과 애국심(愛國心)은 추종(追從)을 불허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온조왕(溫祚王)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인 남한산성에서 개국(開國)한 이후 창곡동에서 태자궁(太子宮)을 짓고 전국의 장정(壯丁)들을 모아 군사훈련(軍事訓鍊)을 시켜 정최예부대(最精銳部隊)를 만들고 찬란(燦爛)하고 빼어난 백제문화를 창출(創出)시키면서 위국충성(爲國忠誠)의 정신(情神)을 각인(刻印)시켰다. 옛 한성백제(漢城百濟)의 수도(首都)로서 한성백제문화(文化)의 발상지(發祥地)이면 전파지(傳播地)이기도 한 곳이다. 이러한 지역특성(地域特性)은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광주목장(廣州牧場)으로서 전국최고의 군마(軍馬)조련지(調練地)로 소문이 났다. 조선중기(朝鮮中期)에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때에도 수없이 많은 유림(儒林)과 백성들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던졌고, 조선시대(朝鮮時代)공신(功臣)들의 능묘(陵墓)가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조선후기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 성호(星湖)이익(李瀷), 순암(順菴)안정복(安鼎福) 등의 실학자(實學者)들이 계속 배출되었다. 조선 말기에는 세계 각국이 선진문화를 이끌기 위하여 개화사상으로 불타오를 때에 개화개념을 가진 유력인사들의 출현이 상당하였던 곳이다. 개화기에 일제가 마수를 뻗쳐올 때에는 이 지역 출신 의병(義兵)들이 창궐(猖獗)할 정도로 외부세력에 의한 지배를 거부하고 나섰다. 나라에 대한 충성심(忠誠心)은 어느 지역보다 전통적(傳統的)애국심(愛國心)의 우위(優位)를 지니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일제(日帝)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는 명분(名分)을 내세워 대한제국(大韓帝國)을 간접통치(間接統治)하면서 온갖 수탈(收奪)을 일삼자 백성들의 원성(怨聲)이 나날이 높아가던 시절에 1919121일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붕어(崩御)가 일본인 에 의한 독살설(毒殺說)이 요원(遼遠)의 불길처럼 팔도강산(八道江山)에 휘몰아 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드디어 일본(日本)동경(東京)에서 유학생(留學生)들에 의하여 191928일 독립만세운동(獨立萬歲運動)이 일어 났고, 이를 시작으로 민족자존(民族自存)의 독립(獨立)을 하여야 한다는 공통(共通)의 명제(命題)에 도달(到達)하였다. 이에 천도교(天道敎)와 기독교(基督敎), 불교(佛敎)의 대표(代表)들과 학생대표등이 사전모의(事前謀議)하여 33일 고종황제(高宗皇帝)의 국상일(國喪日)에 봉기(蜂起)하기로 하였다가 황제(皇帝)에 대한 불경(不敬)이고 불충(不忠)이라는 지적(指摘)에 따라 3.1일로 일정을 변경(變更)하기에 이르렀다.

31일 정오(正午)부터 민족대표(民族代表)33인 중 29(길선주(吉善宙), 김병조(金秉祚), 유여대(劉如大), 정춘수(鄭春洙)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함)서울 인사동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독 시각인 오후 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한편 최린(崔麟)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安淳煥)에게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전화로 민족대표(民族代表)일동이 여기에서 독립선언식(獨立宣言式)을 거행(擧行)하고 나서 축배(祝杯)를 들고 있다고 통고(通告)하게 하였다.

이 통고를 받은 일본경찰(日本警察)80여명이 즉각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包圍)하였다. 이 때 민족대표(民族代表)들은 독립(獨立)을 선언(宣言)하는 한용운(韓龍雲)의 간단한 치사(致辭)를 들은 후, 한용운의 선창(先唱)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삼창(三唱)한 뒤 의연(毅然)하게 일본경찰에게 연행(連行)되었다.

동경(東京)에 밀파(密派)된 임규(林圭), 안세환(安世煥)등은 뒤에 일본정부(日本政府)와 의회(議會)에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등을 우송(郵送)하였다. 상해(上海)에 밀파(密派)된 김지환(金智煥)은 윌슨과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의 각 국대표(各國代表)들에게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와 청원서를 송신(送信)하였다.

탑골 공원에는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 남녀학생 4,0005,000명이 몰려와서 엄숙한 독립선언식(獨立宣言式)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강기덕(康基德), 김원벽(金元璧)등의 연락(連絡)을 받고서 오전수업(午前受業)을 마치자 곧 학교별(學校別)로 달려온 것이다.

오후 2시가 되자 당시에는 신원(身元)이 밝혀지지 않았던 경신중학교 4학년 학생이던 정재용(鄭在鎔. 1886-1976)이 단상(單相)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낭독(朗讀)하였다.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의 낭독(朗讀)이 거의 끝날 무렵에 학생(學生)들은 모자(帽子)를 하늘로 날리며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외쳤다. 그리고 종로(鐘路)로 뛰쳐나와 시위행진(示威行進)에 들어갔다.

본래 독립선언식(獨立宣言式)은 탑골 공원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으나 학생들의 희생(犧牲)을 고려(考慮)하여 민족대표(民族代表)들은 태화관에 모였던 것이며, 탑골 공원의 학생들은 나타나지 않는 민족대표를 기다리다가 정재용(鄭在鎔)이 자진등단(自進登壇)하여,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낭독(朗讀)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독립선언(獨立宣言)을 끝내고 탑골공원을 나설 때는 수만(數萬)의 군중이 호응참여(呼應參與)하여 함께 독립만세시위행진(獨立萬世示威行進)을 전개(展開)하였다. 시위대열(侍衛隊列)이 대한문(大漢門) 앞에 이르렀을 때는 온 서울 시내가 흥분(興奮)된 군중(群衆)의 만세소리로 들끓었다. 시위행렬이 대한문 앞에 이르러서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빈전(殯殿)을 향해 통곡(痛哭)으로 삼례(三禮)를 올린후 행진(行進)하였다. 이때부터 놀란 일본 경찰(警察)과 헌병(憲兵)들이 마구잡이식으로 시위대(示威隊)를 해산(解散)시키려고 몽둥이질을 하다가 결국(結局)에는 총칼을 사용(使用)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남지역(城南地域)의 경우는 낙생면과 돌마면에서 3,000여명이 합세(合勢)하여 죽음을 무릅쓴 독립만세 운동을 펼치었다. 고종황제의 국장에 참여하러 상경하신 한백봉(韓百鳳) 선생과 한순회(韓順會)선생 일행은 3.1일 탑골공원 만세운동의 현장(現場)으로 가셨으나 이미 일경(日警)에게 33인중 29인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왔고, 탑골공원에는 민족지도자(民族指導者)들이 나타나지 않게 되자 당시에 경신중학교 4학년생이던 정재용(鄭在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곧 이어 수많은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돌입(突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만세 시위에 동참(同參)하였던 광주지역(廣州地域)에서 상경한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은 거의 광주 유림소속(儒林所屬)의 인사들이었다. 당시 광주군 출신으로 33인중의 한분이던 이종훈(李種勳, 1858-1931)선생은 천도교인이었지만 광주유림(廣州儒林)출신이었고, 한백봉(韓百鳳)선생이 광주 유림(儒林)의 회장(會長)을 맡고 있었기에 이종훈(李種勳)선생을 비롯한 광주면의 박기환, 김교상, 동부면의 이대헌, 언주면의 김교헌, 이중인, 중대면의 장덕균, 실촌면의 오수식, 오포면의 유면영, 선생 등 많은 유림들이 참여하여 토론(討論)을 한 결론(結論)은 조국(祖國)을 구()하자는 대한독립만세운동(大韓獨立萬歲運動)을 고향(故鄕)인 광주(廣州)에서도 동시다발적(同時多發的)인 시위를 맹약(盟約)하여 326일부터 독립만세운동(獨立萬歲運動)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이 끝나고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고, 한백봉 선생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만세운동에 필요한 자금(資金)을 모금하기 시작하여 한태회(韓泰會)선생이 선뜻 내어주신 백미(白米)한섬을 비롯하여, 문중어른들과 인근(隣近)마을인사들의 적극적인 협조(協助)로 만세운동 소요자금(所要資金)을 모으면서 재료를 구입하고 태극기(太極旗)를 만드는 한편으로 인근(隣近)유지들과의 비밀결사(秘密決死)연락을 하여 만세운동 준비에 박차(拍車)를 가하였다. 그렇게 만반(萬般)의 준비(準備)를 하고 드디어 326일 저녁에는 율리 주민(住民)100여명과 함께 마을 뒷산인 모란봉(牡丹峰)에 올라가 밤새도록 내일 만세시위(萬歲示威)를 알리는 봉화(烽火)를 올리며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불렀다. 327일 새벽이 되자 각자 집으로 가서 아침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마을에서 모여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부르면서 분당리 장터로 향하였다. 오전 10시경에 모인 군중은 수천여 명을 넘었고 한백봉(韓百鳳)선생의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낭독(朗讀)에 이어 곧바로 만세시위(萬歲示威)에 돌입(突入)하였다. 이때에 일본(日本)육군헌병상등병(陸軍憲兵上等兵)마쓰시마 이스지라는 일본헌병 판교주재소장(板橋駐在所長)도 함께 만세를 부르고 다녔다. 는 구전(口傳)도 있고, 경기도(京畿道)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에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시위대(示威隊)가 낙생 면민들과 합쳐지자 그 수효(數爻)는 삼천(三千)명이라는 헤아리기 조차 힘든 많은 군중이 되었고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소리는 천지(天地)를 진동(震動)하고도 남을 만큼 크고 우렁찼다. 배고픈 줄도 잊은채 낮이 지나가고 밤이 지새도록 만세를 부르며 민족자존(民族自存)의 독립정신(獨立精神)으로 중무장(重武裝)하고,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부르짖으며 망국(亡國)의 한을 달래던 시위대는 새벽에 각자 집으로 돌아가 아침식사를 하고 328일에도 3000여명이 다시 모여 시위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28일이 되자 일제(日帝)의 태도(態度)가 급변(急變)하였다. 어제 까지만 해도 긍정적(肯定的)이고 동조적(同調的)이었던 헌병(憲兵)들이 시위대의 해산(解散)을 종용(慫慂)하였고 해산할 수 없음과 민족자존(民族自存)에 의한 대한독립에 대한 논리적(論理的)으로 설명하자 헌병(憲兵)들은 총칼과 채찍으로 협박(脅迫)하기 시작하여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되었고 주도자(主導者)인 한백봉(韓百鳳)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시위군중들이 헌병대(憲兵隊)로 연행(連行)되기에 이르렀다. 연행된 시위군중들은 모진 매와 말로는 표현 못할 형언(形言)할 수 없는 고문(拷問)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져 유혈(流血)이 낭자(狼藉)하여 차마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뇌부(首腦部)를 잃은 군중들은 마지막 한사람이 남더라도 만세시위를 중단(中斷)할 수 없다며 계속하여 만세시위를 진행하다가 초강력대응(超强力對應)하는 일제의 총칼과 협박(脅迫)에 못 이겨 밤늦게 해산(解散)하고 말았으나, 이튿날에도 시위는 아침 일찍부터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수뇌부(首腦部)가 없는 시위대는 사기(士氣)조차 저하되어 그만 329일 저녁에 쓸쓸히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연행된 시위군중들은 모두 남한산성(南漢山城)헌병대(憲兵隊)로 압송(押送)되어 온갖 회유(懷柔)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가혹(苛酷)한 고문이란 고문을 다 받으며 대한독립의 당위성(當爲性)을 말하고 만세를 부르며 버티었으나 이미 계획(계획)된 그들의 연행에 변변히 저항(抵抗)도 못하고 형언(形言)할 수 없는 극형(極刑)의 처벌(處罰)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백봉 선생은 모의(謀議)와 조직(組織)을 만든것은 내가 하였다. 대한독립만세시위진행계획(大韓獨立萬歲示威進行計劃)과 대한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모든 책임(責任)은 나에게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귀가(歸家)시켜 농사에 전념(專念)하도록하라.” 고 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일관(一貫)하시며 내가 조선인으로서 내 조국 대한의 독립을 주장(主張)함은 죄가 아니다.” 라고 강변(强辯)하시며 무죄(無罪)임을 주장하셨으나 결국에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검찰청(檢察廳)수원지청(水原支廳)으로부터 98개월을 구형(求刑)받고 항고(抗告)에 항고를 거듭하였다. 당시의 일제(日帝)의 간교(奸巧)한 유화술책(宥和術策)은 판결문(判決文)에서 확인하여 읽을 수 있다.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 53.1운동 재판기록 291쪽과 292쪽에 보면

피고는 소위 보안법 제7조 조선 형사 령 제42조에 해당하는바, 위 범죄 후에 발포된 대정(大正)8(1919)415일 제령 제7호에 의하면 동 제령(制令)1조에 해당(該當)하므로 형법(刑法)5, 8, 10조에 따라 신, 구 양법을 비교대조하면 구법인 보안법 제7조의 형이 경()하므로 동 법조(法條)를 적용하여 그 소정 형()중 징역형(懲役刑)을 선택(選擇)하여 그 범위 내에서 처단(處斷)할 것이며.....” 라는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은 대한독립만세운동(大韓獨立萬歲運動)이 발발(勃發)하자 조선인들의 독립의지(獨立意志)를 꺾을 생각으로 415일에야 악법(惡法)을 급조(急造)하였는데 국제여론(國際輿論)이 악화(惡化)되자 급히 유화책(宥和策)으로 급선회(急旋回)하였다는 증거(證據)이다. 한백봉(韓百鳳)선생은 고등법원(高等法院)의 항소(抗訴)에서도 유죄(有罪)를 선고(宣告)받자 최종심(最終審)인 복심원(復審院)에 항고(抗告)하였으나 끝내 38개월을 언도(言渡. 선고(宣告)의 구법용어)받고 복역(服役)중에 영친왕(英親王)과 방자(房子)여사의 결혼 특사(特赦)13개월 만에 은면(恩免)으로 출옥(만세)하시었다. 그 증거(證據)가 한백봉(韓百鳳)선생의 서대문(西大門)형무소(刑務所) 수형자(受刑者)신상(身上)기록카드에 출옥사유(出獄事由)가 은면(恩免)가출옥(假出獄)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는 사실로 판명(判明)할 수 있다. 가출옥(假出獄)이라는 용어는 현재진행형(現在進行形)의 용어(用語)이기 때문에 명쾌(明快)하게 국가(國家)가 정리(整理)하여야 할 필요(必要)가 있는 데도 아직도 일제의 잔재(殘滓)가 남아 있는지 아직도 정리(整理)하지 않고 있다.

돌마면과 낙생면에서 동원된 시위 군중의 수효가 3,000명이라는 기록은 일제(日帝)육군과 해군에서 본국정부(本國政府)에 보고(報告)한 조선소요사건일람표(朝鮮騷擾事件一覽表)에 확실(確實)하게 기록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3,000명이 대단위 시위를 벌인 대규모(大規模)시위군중 중에서 한백봉(韓百鳳)선생 한분만이 옥고(獄苦)를 치루시었으니, 그 분의 자기(自己)희생정신(犧牲精神)은 천만인(千萬人)에게 만고(萬古)의 귀감(龜鑑)이 될 것이다.

한백봉(韓百鳳)선생은 출옥(出獄) 후에도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이 주창(主唱)한 농민운동(農民運動)에 적극참여 하였고 물산장려운동(物産獎勵運動)에도 솔선수범(率先垂範)하였으며, 농민운동(農民運動)에도 적극적 이었다. 신간회(新幹會)광주지회창립(廣州支會創立)에도 간사(幹事)를 맡는 등, 모든 독립운동에 앞장서서 적극적(積極的)으로 활동(活動)하시어 원근(遠近)의 유지(有志)들이 모두 하나같이 경외(敬畏)하였다. 노년(老年)에는 인근(隣近)의 후학(後學)들을 가르치며 애국심(愛國心)을 고취(鼓吹)시킨 일도 유명하다.

이 지역출신(地域出身)으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신 분들 중 남상목(南相穆)의병장과 윤치장(尹致章)의병장, 한백봉(韓百鳳)애국지사는 건국훈장(建國勳章)을 추서(追敍)받았으며, 신간회(新幹會)광주지회장(廣州支會長)을 역임한 한순회(韓順會)애국지사는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을 추서(追敍)받았다.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살고 있다. 3.1 독립만세운동(獨立萬歲運動)때에 가장 절실(切實)하게 각인(刻印)되었던 민족자존(民族自存. 우리 민족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의 독립정신(獨立情神)과 위국헌신(爲國獻身. 나라를 위하여 몸숨을 바친다는뜻)을 위한 자기수양정신(自己修養情神)을 계승(繼承. 계속하여 이어가는 것)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제(日帝)에 의하여 왜곡(歪曲. 사실과 다르게 그릇처놓는 것)된 일만년역사(一萬年歷史. 세계적인 서지학자(書誌學者)이며 역사학자(歷史學者)인 자유중국(自由中國)의 서량지(徐亮之)선생이 한국(韓國)의 역사는 bc7217년이라고 알려 주셨다. 이를 토대(土臺)로 우리의 역사를 분석(分析)하면 환인(桓仁)조선 3320년 환웅(桓雄)조선 1564년 단군(檀君)왕검 이후가 4352년이므로 9236년이 되는 것이다. , 한단고기에는 환인조선 3301, 환웅조선1565년으로 기록되어있다.)를 되돌리지 못하고 있으며, 각종문서에 오류(誤謬. 잘못되어 이치에 어긋나는 것)를 바로 잡지 못하고 있는 현실(現實)이 안타까운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사항(事項)들이 모두 해소 (解消. 이제 까지의 일이나 관계를 해결하여 없애버리는 것)되어야 진정(眞正. 거짖이 없고 참된 것)한 독립(獨立.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서는 것)이 이루어 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편집 / 한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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